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늘어 나는 것, 줄어 드는 것은 무엇인가
줄어 드는 것은 자신감이다 그렇지만 줄어 든다고 해서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나이 드는 사람들에게 은퇴하고 세상에서 그 모습을 서서히 줄여 나가길 바라고 실제로 그렇게 삶이 진행 되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요구하는 바가 줄어들고 그만큼 필요로 하는 바가 줄어 들어 중요하고 필요불가결한 것들에서는 제외되어 간다.
있어도, 없어도, 존재가치가 사회 속에서 의미가 없어져 간다. 그렇다고 존재 자체가 문제, 이슈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노인의 증가는 문제이며 비용이다. 생산적인 것들이 사라져 가고 부담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과 되려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볼 때는 대부분이 인생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치 못하고 과거의 자신을 빗대어 억지로 몸짓하는 몸부림이다. 이것들이 설령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될 지라도 궁국적으로는 인생의 흐름을 이탈하고 자연의 거스름일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 치고 딴에는 노력하고 목표 지향적이라도 결과는 떨어지는 꽃, 지는 해이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요구로 당연하다 오히려 잃지 않는 것은 자기 부정이며 욕심이다.
자신감이라는 남들보다 더 무언가는 잘하거나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는 오히려 자신감이 아닌 자존감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젊었을 때의 자신감의 장려 시기와는 달리 아름다운 퇴장을 기대하는 노년이기 때문에 자신감은 바로 추락 하기 쉽고 그에 더불어 자존감을 잃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을 고려해 주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될 때 스스로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고독은 스스로 자신감을 잃어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치피 잃어버릴 자신감을 자꾸 가지려 할 필요도 없고 그를 위해 자신을 채근할 이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떨어진 자신감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자신감을 잃지 않으려면 역설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된다
자신감이 떨어져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저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남들에게 겸손하고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반면 어른으로 보고 그들의 삶과 일 행동을 존중 존경하면 나라는 늙어 가는 노인은 그 자체로 사회속에서 바람직한 노인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더 하려고 하지 말고 그 더이상은 젊은이들에게 그냥 맡기자 그냥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면서 토달지 말면서 내가 더 이상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그들이 만든다. 나는 이미 그들이 아니다 조연도 아니고 그냥 그러나 없으면 안되는 엑스트라다 엑스트라가 주연과 감독의 연기와 연출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엑스트라처럼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며 묵묵히 그들의 진행에 따르면 된다 그렇게 내 소임을 하면 된다 지금 이 시간과 하는 일을 주변을 소중히 나의 삶으로 살아 가면 된다
그냥 소중히 여기면서 욕심 없이. 나에게 자신감이 있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자신감이 없어 스스로 위축되거나 자신감으로 우월해 질 일이 없다. 그로 인해 희비를 느낄 일도 없다. 세상이 돌아가는데 같이 돌아가며 사는 것이 즐거움이다.
늘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고집과 아집,분노,집착 경험에 대한 맹신적인 인식, 서운한 감정이다
나이가 들면 이상하게 자신의 주장이 더욱 강해지고 더불어 타인의 생각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해 진다. 자신의 장구한 시간 동안 굳어진 사고 방식에 의해 사리 분별의 정도가 크게 떨어 지고 자신만의 생각의 틀에 갇혀 고집쟁이가 된다. 서로 이야기할 틈이 없어진다. 또한 이 것이 조금만 진행되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경향을 보여 끝내 사고와 의견의 교환이 아닌 일방적인 논쟁으로 상호간의 불신을 야기하고 서로 회피하게 된다. 결국 노인은 사회의 소외로 들어 가게 된다. 남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고 사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노인은 경험에 대한 집착과 확고한 인식이 있어 가르치려 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경험의 가르침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가르침은 받아 들이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가르침으로 남을 개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르침은 하나의 이벤트이며 받아 들이는 사람에 의해 변화 될 수 있는 팁일 뿐이다. 즉, 절대적이거나 우선적이거나 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경험을 고집하고 그 전달 사항이 절대적인 양 물러 서지 못하는 가치로 집착한다. 이 집착을 상대방이 받아 들여 주지 않으면 마치 이치에 맞지 않은 일 인 듯이 서운해 하고 개인적으로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표출하고 상대방을 배척한다. 과거와 경험에 묻힌 자기만을 고집하는 이해 소통이 안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는 알지 못하여 스스로 서운함과 고립감을 만들어 자신을 가두어 스스로 상대하기 싫은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
어떻게 하면 고집, 분노,집착을 버리고 서운한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미 몸에 베어버린 고착된 사고 방식과 사물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기는 어렵다. 젊을 적에도 어렵지만 그때는 그래도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논의와 협상 경쟁을 통해 사회에서 인식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노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사회를 조직을 이끌어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를 좇아 가는 것이기에 아무리 본인이 타당하다고 생각 하더라도 그것은 그간의 경험과 개인의 사고 방식에서 온 것으로 옛날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거의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에 언급한 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활용하는 하나의 팁일 뿐이다. 그래서 주장해서는 안된다. 채택될 것을 바래서도 안된다. 그것이 고집과 분노 서운함을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이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고 참여한다.
의견을 묻지 않으면 제시하지 않는다.
제시한 의견은 주장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상대방과 연계되는 것이 있다면 묻고 그들의 답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고집과 습관적인 주장이 나온다.
결국은 본인이 서운해 진다.
가르치지 말고 따르고 의견 내지 말고 의견을 구하면 주고 그에 주장하지 말고 결과를 무조건 받아 들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남들의 의견을 따라 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내가 분노를 느끼고 서운해 지는 것은 내 말을 내 생각을 남 들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나이 든 사람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지만 그들이 취할 것 으로서 그들 생각의 일부 보충으로 듣는 것이지 액면을 듣는 것은 아니다. 안 듣는다고 생각 해야 맞을 것이다. 어차피 안 들을 것에 서운해 하거나 분노할 일이 있을까?
나를 주장하지 말고 잊고 그들을 따라 사는 삶을 만들어야겠다.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마음속 깊이 되뇌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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